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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쪼가리글

물망초

전투가 끝난 늦은 밤, 폐허 한 구석에서 새벽빛 머리카락의 주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리다가 자신의 기록장을 새로이 넘겨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였다.

 

 



친애하는 ■■에게

음, 편지 쓰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렇지?
분명 저번에 편지 쓸 때도... 앞으론 자주 써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거 같은데.. 미안.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내가 너무 바빴거든... 지금도 바쁘고 말이야.
으음... 분명 너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
너무.. 오랫동안 꿈속에 있는 기분이라서 그런가?
하하, 여전히 난 자각몽 속인거 같아, ■■아..
...날 언제 깨우러 와줄 거야? 그래야 내가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나 좀 데리러 빨리 와줘.
나 너 없어서 너무 심심해.. 그리고 외롭기도 한 거 같아..
..너라면, 그게 무슨 낯간지러운 말이냐고... 부끄러워했을 거 같네.
있잖아, 사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거 같아.
상부와 약속했거든... 내가 알길 바랐던 걸 꼭 알려주겠다고..
거짓말이면 어쩌지.. 으음, 너처럼 그냥 죽어버릴까... 물론, 너보다 더욱 하찮고.. 의미 없는 죽음일지라 너가 정말 싫어하겠지만 말이야.
...거기는 어때? 여전히 평화롭나? 기왕이면... 널 닮은 굳센 나무들과 푸른빛 꽃들이 가득 널려있으면 좋겠다.
여기는 그렇지 않거든. 아무래도... 먼지도 많고 더럽고... 빛도 그닥 잘 들어오는 거 같지 않아.
그런데, ■■아.. 나 지금... 너무 졸린 거 같아. ..잠이 오는데 자고 싶진 않아.. 꿈속의 꿈은 조금... 우습잖아
.....꼭 이번 전투에서 이겨서 네 억울함을 풀어줄게.
..그러니까 나쁜 짓한다고.. 너무 구박하진 말아 줘.
전부, 전부.. 너를 위한 거라고 자부할 수 있으니까..
아, 그래.. 하려던 말 생각났어.
이번에, 너를 찾아갈 땐... 물망초가 괜찮을 거 같아.
흰 국화는 너무 식상하잖아..
..음, 꽃다발로 사들고 가면 얼마 안 가 시들 거라고.. 넌 싫어하려나?
그렇다면, 모종으로 사갈게.. 꼭 네 옆에 심고선.. 시들지 않도록 내가 잘 가꿔볼게.
그렇다면.. 괜찮겠지?
...그래,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 끝내자.
더 많이 적어버리면.. 널 만나고 할 얘기가 하나도 없을 테니까..
... 잘 자, 내 가장 친한 친구야.


 

 


하고픈 말을 다 마친 그는 피식 웃고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선, 길고, 정성스럽게 적은 편지에 불을 붙였다.
담배는 오랜 시간 동안 꺼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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