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숨어버린 어느 밤. 외로이 놓인 하나의, 석재 건물이었지만, 천장조차 남지 않아 건물의 존재 의의를 상실한 돌무더기가 침입자에 부스러기를 흘렸다. 올빼미조차 고개를 돌리고, 별들도 반짝이지 않는다. 용서받지 못할 마법의 빛이 사그라든 어느 전쟁터의 전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예나가 공허한 눈으로 새카만 하늘을 바라본다. 메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축이고,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이 전쟁에서 헤맨다. 뚜렷한 목적의식 하나 없이, 알량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떠밀리듯 예나 자신의 손으로 택한 길에서 의문을 느꼈다. 한숨이 허공에 체류하고, 귓가에 닿던 순간. 발소리가 들린다.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예나가 지팡이를 내밀며 나지막이 말한다.
"루모스 .... .… 넌, "
지팡이 끝에서 빛이 나온다. 반사적으로 입이 다물렸다. 예나를 불사조 기사단으로 이끈 그가 눈에 들어온다. 검은 후드 사이로 보이는 생김새, 잊을 수가 없던 그였다. 효명, 가장 친했던 첫 번째 마법사 친구. 그리고, 늦게 알아챈 짝사랑, 이제는 애증이 되어버린.
반대편에서 걷던 효명 또한 놀란 눈으로 예나를 바라봤다. 효명이 꽤 오랜만에 만나는 예나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선이 가늘고, 묘하게 거친 느낌을 풍겼다. 그리고, 눈에 애증이 서렸다. 사랑은 하지만 더 강해진 꼭 4학년부터 6학년까지 효명에게 존재했던 그 눈빛이랑 닮아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효명은 불안했다. 도망친 곳에서 만난 예나는 달갑지 않았다. 침묵이 감돌았다. 효명이 메마른 입술로 운을 뗀다.
"… 오랜만이야, 예나."
한동안 미소조차 짓지 않았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그리고 덧붙였다.
"..... 정의, 네."
예나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적이었다. 예나의 앞에서, 그토록 보고 싶던 그 웃음을 보여주는 그는, 지팡이를 들었다. 낭창한 예나의 지팡이와는 다른. 우직하고 단단해 부러지기 쉬운. 효명이 예나에게 가까워졌다. 이렇게 된 게 언제였더라. 효명은, 제 눈앞 예나의 처음을 알았다.
웅성이는 연회장. 한참 모자가 기숙사를 분류하던 그때, 효명은 맨 앞에 나갔을 때, 예나를 처음 봤다. 처음 본 순간 바로 알았다. 호그와트 급행 열차에서 마주쳤던 아이라는 것을. 짧은 순간이었으나 처음 본 특이한 머리색을 기억한 탓이었다. 묻어뒀던 반가움이 고개를 내민다. 애써 티 내지 않으며 모자에 닿자, 모자는 공공연한 사실을 말하는 양 큰 소리로 외친다.
"뱀들 같은 가문의 아이구나. 웅크리고 있어, 열정도 없고 순수한 피도 아니고. ... 하물며 열등감으로 차 있지만 순수한 지식욕은 크구나. 그래, 너는 그곳이 어울리겠군. 래번클로!"
래번클로 테이블에서 큰 박수 소리가 들렸다. 효명은 그 박수 소리가 썩 달가웠다. 환영받지 못할 열등한 피인 주제에 감히 온기를 탐했다. 박수 소리가 멎고, 래번클로 테이블에 앉았을 무렵. 방금 본 그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웅성이는 소리가 가득하다. 다른 생각으로 가득해 듣지 못한 웅성임이 적응될 수 있을 리가. 모두가 예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예나는 그런 시선에 그저 모자를 쓸 뿐이었다. 언어는 들어오지 않았다. 모자는 다시 한번, 공공연한 사실인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순수함을 고집하는 가문의 아이구나. 가장 깨끗한 피야, 야망도 커. 너에겐 더할 나위 없이 그곳이 어울리겠어. 슬리데린!"
당연한 결과인 양 옅은 미소를 띤 예나가 슬리데린 테이블로 다가갔다. 효명의 옆 테이블이었다. 뒷자리가 어수선해, 효명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조금은 불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가장 순수한 피인 이들은 알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열등감은 효명을 좀먹었다. 천천히 모두 먹혀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효명에게는, 각자 기숙사로 가는 시간이 그나마 남은 숨구멍이었다. 순수한 피가 되고 싶다. 될 수 없다. 기숙사 암호를 풀고 들어갈 때, 효명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걸, 슬리데린은 어려워할 테니. 추악한 만족이었다.
예나는 슬리데린 기숙사로 이동하며 친구 몇을 사귀었다. 모두 이름 있는 가문의 자제들로, 일전 파티 때 안면을 튼 적이 있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들은 피에 집착했다. 순혈, 순혈. 열등한 혼혈, 머글. 더러운 머글냄새. 온갖 혈통 차별이 존재함에도, 예나는 그런 것에 큰 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날이 가면 갈수록 멀어졌다. 슬리데린의 별종, 그게 예나의 별명이었다.
예나가 대부분의 슬리데린과 척을 질 무렵, 효명과 예나가 마법약 강의를 함께 들었다. 정각에 맞춰 도착해버려 자리가 효명의 옆뿐이었던 탓이었다. 더하여, 같이 앉은 사람끼리 조별 과제를 한단 소리에 효명과 예나는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던가. 효명은 함께하게 된 예나가 순혈, 빌어먹을 슬리데린들과 어울리지 않는단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옅은 호감이 생겼다. 그래봤자 열등감이 훨씬 컸지만.
효명의 열등은, 잊을만하면 불쑥 치고 올라왔다. 래번클로의 학생으로 도서관에 있다가 복도로 나서면 4학년이면서 집안 사상에 세뇌된 이들이 킥킥댔다. 더러운 피. 그러다 예나와 인사라도 하면 그들은 소리를 죽여 소곤거린다. 그러하여, 효명은, 결국 제 열등의 대상을 예나로 맞췄다. 초점을 잘못 맞춰버려 감정의 형태로 변했지만.
4학년의 추운 겨울. 효명은 감정이 사랑으로 변질했음을 인정했다. 겨울이었다. 반짝이는 눈 아래 유독 푸른 예나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지나갈 감정이기에, 효명은 평소와 같이 지냈다. 사랑을 알기 전이나 후나, 그저 넘실대는 감정을 눈에 담아내고, 덜어낼 뿐이니.
6학년의 겨울. 사랑으로 변질된 감정이 돌아왔다. 휘발된 사랑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본래 그랬다는 듯 그저 우정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어느 백일몽이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감정의 유통기한은 2년이구나. 이 우정이 7학년 이후면 끝날 터이니, 대강 맞았다. 예나는 좋은 친구였다.
예나는 치열하게도 살았다. 슬리데린에서 몇 없는 특이점으로 살아남으며 주위를 살필 여력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 겨우 자리를 잡고 여유를 가지게 된 6학년의 어느 가을날. 또 마법약 조별 과제의 페어가 된 효명과 예나는 스쳐 지나가듯, 그날도 그리 대화했다.
"이번 과제 아모르텐시아였나?"
"아모르텐시아 말고 아모텐시아. 사랑에 빠지게 하는 약."
"펠릭스 펠리시스나 만들지."
"그러게, 사랑이 그렇게도 좋은가?"
"사랑이라… 효명아, 넌 어떤 사람이 좋아?"
"음, 글쎄… 정의로운 사람?"
가을의 붉은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을 때. 정의란 단어가 예나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정의, 효명과 어울린다고는 하지 못할 단어이기에 되물어본다.
"갑자기 웬 정의?"
"난 정의롭지 못하거든. 그러다 보니까,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이 좋더라."
"...내가 보기엔 너도 충분히 정의로운데."
"... 그런가? 하하, 글쎄.. 재료는 내가 기억했으니까, 끓이는 건 너가 해줄래?"
"… 응, 너 실력으론 어림없겠다."
"나도 잘못하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
동시에 한숨이 터진다. 그러다 작게 웃음이 터지고, 결국 그날은 재료는 커녕 통금에 급하게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다. 이야기꽃이 만개한 탓이었다.
예나는 7학년 끝자락에야 사랑을 받아들였다. 마법약 수업도 무사히 끝냈지만, 모르는 걸 물어본단 명목하에 효명과 종종 만났다. 그 날도 도서관에 가던 중, 효명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완벽한 가문의 오점. 효명이 가장 잘 아는 소문이었다. 예나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효명에게 도달하는 소리는 달랐나. 약속 장소인 도서관까지 가는 중에도 조용히 입술을 짓이기던 예나의 앞에 효명이 나타났다. 다니는 이가 얼마 없는 도서관 구석이었다. 효명은 예나의 키에 맞게 몸을 낮춰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들어 아랫입술을 톡 친다. 다정하고 장난스러운 손길이었다.
"입술, 다치잖아."
효명의 말에는 옅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잠시 멈칫한 예나가 놀라 뒷걸음질 치고, 그렇게 뒤에 책장에 부딪혔다. 정신 차린 예나가 됐다며 먼저 도서관을 빠져나가고, 효명은 예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 헤어지고 나서도 효명과 예나의 관계는 다름이 없었다. 그저 공부메이트, 아는 사이. 친구라는 선에 아슬하게 걸쳐버린 안타까움.
호그와트의 졸업식 날, 예나는 효명과 인사했다. 효명은 연락하겠다며 먼저 떠나갔다. 예나도 빠르게 흐릿해지는 효명을 바라보다 연락하겠지, 싶은 안일함을 안은 채 호그와트를 떴다.
예나가 불사조 기사단으로 간 이유는 오직 효명의 말 한마디가 생각나서였다. 예나의 학교 내 평판도, 행동도 딱히 불사조 기사단과는 관련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예나는 불사조 기사단이 될 수 있었다. 떠나간, 짝사랑하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으니까.
한참 죽음을 먹는 자들을 쫓던 중, 가면 사이로 익숙한 푸른빛 검은 눈동자를 본적이 있었다. 처음엔 부정, 후엔 분노. 이내 수용. 애정이 담겼던 눈은 증오까지 한곳에 담아 흘러넘쳤다. 그 날부터 서른 일곱번째 밤이 지나던 중이었다. 넘치는 감정이 루모스에 전달된 듯, 잠시 반짝였다.
효명이 예나의 지팡이 끝을 봤다. 예나의 지팡이는, 볼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괜스레 씁쓸한 입안을 무시하고 지팡이로 한 발짝, 또 한 발짝. 천천히 다가간다. 어느새 루모스가 발한 지팡이 끝이 가슴팍에 닿을 무렵, 효명이 빙그레, 작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죽일 자신 있어?"
예나가 효명을 시리게 노려본다. 장담할 수는 없어, 예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저조차도 이 애증이 어디에 기울었는지 알 수 없기에, 때 아닌 찬 바람이 침묵을 날려 보내고, 효명은 지팡이를 천천히 꺼냈다.
"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쓴 맛의 비소가 안면에 만연했다. 효명은 천천히 예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엔, 무감각도 존재하지 않아 꼭 심연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예나가 입술을 짓이기다 효명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검고 푸른 눈에는 여전히 애증이 깃들어있었다. 효명이 예나의 턱을 쥐고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훑는다.
"입술, 다치잖아."
언젠가의 도서관에서와 같은 다정한 손길이었다. 예나는 그런 효명을 여전히 애증했다. 효명은 그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이었지만.
카테고리 없음